하느님은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갓 신자 생활을 시작한 한 신자가 미사 때 이루어지는 동작들 하나하나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게 물어왔을 때, 신자 생활을 꽤 오래한 저 역시 그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습관적으로 신자들의 동작을 따라 하고, 신부님이 행하시는 동작들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 왔음을 알았을 때 참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미사 때 행하는 동작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간이 천사와 같은 순수한 영적 존재라면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영적으로 직접 전달할 수 있을 터이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말과 몸짓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의사를 상대에게 직접 전하기가 힘듦을 깨달은 인류는 끊임없이 각 지역과 문화에 따라 언어적 표현과 행위적 표현(몸짓)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 습관과 문화가 온 인류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인사하는 방식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이는 방식을 사용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볼에 입을 맞추거나 악수를 함으로써 반가움을 드러냅니다. 같은 지역,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몸짓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때의 인사 방식과 지금의 인사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전례 동작 가운데 우리는 현재 전례, 특히 미사 안에서 발견되는 동작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합니다.
성당에 들어설 때 성수를 찍어 십자를 긋는 행위와, 미사 시작 때 사제가 십자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할 때 신자들도 십자를 그으며 “아멘!” 하고 대답하는 것은 세례 때의 우리 신앙 고백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바로 성부.성자.성령께 대한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수(聖水)가 세례수를 상기시키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말 역시 세례를 베풀 때 하는 기도문이라는 데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읽기 전 신자들이 모두 이마와 입술, 심장(가슴)에 엄지손가락으로 십자를 긋는데, 이 역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이마에 긋는 십자 성호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입술에 긋는 십자 성호는 복음 선포를, 가슴에 긋는 십자 성호는 복음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이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말한 삼위일체 신앙과 연계시켜 해석한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한 일어섬은 희망과 믿음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이자, 사제직을 수행하는 이의 자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이란, 서품성사를 통해 사제가 된 이들의 직분만을 뜻하지 않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물려받은 모든 신자를 말합니다.
성찬례 안에서만 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성서를 읽으실 때 일어서셨다는 복음의 기술(루카 4,16)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서 있는 동작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존경심을 가리킵니다. ‘알렐루야’와 더불어 시작되는 복음 낭독 때 우리 모두가 일어서는 것은 바로 사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서 있는 자세는 또한 마르 11,25(여러분이 서서 기도하려고 할 때에 …)와 루카 18,11-13(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제가 성당에 입당할 때부터 본기도를 할 때까지, 신앙고백부터 보편 지향 기도를 할 때까지, 이외 미사 중에 일어서는 것은 사제와 더불어서 함께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베네딕토에 의하면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할 때 서서 하였다고 합니다.
일부 본당에서 성당이 비좁다는 이유로 장궤틀을 없애는 일이 있는데, 이는 우리 몸을 이용하여 더욱 간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단 자체를 없앴다는 점에서 잘못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1세기에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성체 앞에서 이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16세기에 미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다가 결국 1570년의 비오 5세 로마 미사경본 안에 포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유럽식의 인사 자세인 이 동작이 우리 실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한국 교회는 성당에 들어갈 때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우리 풍습에 맞추었다는 점에서 참 잘된 결정이라 하겠습니다. 이전에는 성체를 모시고 나서 제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곤 하였는데, 이제는 성체 앞에서나 제대 앞에서 허리를 숙여 절하거나 양쪽 무릎을 다 꿇고 기도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회기도의 “제 탓이요.” 부분에서 가슴을 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세리의 마음이 되기 위한 것이므로 신중하고도 진지한 마음으로 이 동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 신자들이 성체를 받들어 올릴 때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 가슴을 치기도 하는데, 이는 본래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것이므로 전례 안에서 이 순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작도 일종의 언어입니다. 사제가 어떤 동작을 취한다 해서 그것이 마술적 힘을 가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전통적으로 어떤 동작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 때문에 각 동작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이 취하는 동작의 의미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사제가 취하는 자세가 뜻하는 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의 안수를 받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직분을 이어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에 드러나 있듯이, 안수는 직무의 전달과 그 직무를 수행할 능력의 전수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안수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세례 때 안수를 해줌으로써 세례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음을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안수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선물을 뜻했습니다. 축복도, 직무의 전달도, 병의 치유도 모두 성령의 선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미사에서의 안수는 사제가 손을 모아 빵과 포도주 위에 펴 얹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때의 의미는 성령이 빵과 포도주 위에 내려오시어 그것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달라는 청원의 의미입니다. 전례학에서는 이것을 에피클레시스(epiclesis)라고 부르는데, 성령을 청하는 기도라는 뜻입니다(여기서는 이 말을 ‘성령청원기도’라고 번역했음).
성찬 제정 말씀 다음에 빵과 성작을 받들어 올리는 것은, 이 순간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한다는 신학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를 보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열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2세기에 빵을, 13세기에는 성작을 들어 올리는 관행이 나왔습니다. 이로써 마침 영광송 때 빵과 성작을 받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성찬례 안에서 이루어진 파스카 신비를 경하하는 의미가 상당히 축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반과 성작을 받들어 올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과 경외심을 끌어내면서, 성체와 성혈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을 드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마침 영광송 때의 받들어 올림이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감사기도 끝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신도들이 이에 “아멘!”으로 대답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